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이우스 마리우스 (문단 편집) ===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 마리우스는 로마군의 질적 저하가 심각한 것을 파악하였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에서 중산층의 몰락으로 인해 로마 군단병의 조달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이 때문에 재산 하한선을 낮춰 징집 대상의 폭을 넓혔고 따라서 로마 군단병의 전체적인 무장 수준은 저하되었다. 또한 8만에 달하는 로마군의 손실은 쉽게 채워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때문에 기존의 방식으로는 30여만에 달하는 게르만족을 저지할 충분한 수의 로마 군단병을 조달할 수가 없었다. 로마의 중산층이 몰락한 이유는 당시 로마 중산층을 이루는 이들은 자영농민들이었는데 로마의 영토가 확대되자 해외에서 값싼 수입 곡물이 들어오면서 자영농 계층은 몰락하게 되었고 또한 이들이 해외 원정을 나가는 동안 그들의 영토가 황폐해져 많은 이들이 파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상태였다. 로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징병대상자의 재산 기준을 완화했으나 사실상 빈곤층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가족 걱정에 군복무를 제대로 할 리 만무해서 오히려 전투력만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때문에 마리우스는 의무병역 해당자들을 소집하는 대신 기존에 있었던 비상시 유급지원병 모집제도[* 2차 포에니 전쟁 때와 같은 국가비상사태 시 중산층 중장보병이 부족할 경우 장비비용와 복무비용과 봉급을 국비로 지급하는 댓가로 자진입대를 받아 군단을 만드는 제도는 원래 있었다. 물론 정규군단만으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때 임시로 시행되는 제도였지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아프리카 원정작전 때 정식 집정관 군단을 배정받지 못해서 유급지원병과 시칠리아 주둔병력으로 전력을 충당했다.]를 확대하여 아예 순수한 유급지원병만으로 군단을 구성하도록 하였다.[* 기존의 병역대상자들은 군대에 가지 않으면 그에 따른 세금을 내는 것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병력이 충분히 모이자 기존의 [[징병제]]를 전면 폐지하였으며 이렇게 모인 병사들이 전쟁이 끝나면 토지를 비롯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한 결과 충분한 병력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은 돈을 통해 로마 군단의 통제권을 지휘관이 과도하게 갖게 되고, 오랜 기간 같은 지휘관 아래 같은 군단이 있게 됨으로써 사병화를 불러오게 된다. 이것은 빈곤 해결과 군사력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획기적인 개혁이었지만, 이러한 방식은 병사들이 지휘관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대가 나타남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결점은 [[술라]]가 [[독재관]] 자리을 차지한 시기에서도 고쳐지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로마에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전쟁, 즉 군사적 역량을 갖춘 정치인들 간의 군대를 동원한 권력다툼, '''[[내전]]'''을 펼쳐지게 하는 계기를 낳았다. 훗날 공화정을 무너트리는 인물에 속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역시 마리우스의 덕을 본 셈이며,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정을 시작한 후에 상당부분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로마 내전은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중산층의 몰락도 근본적으로는 혈연 세습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그외의 귀족층이 '시민병 제도' 시절부터 중산층 파산을 묵과하고 부를 독점한 탓이고, 사병화도 특정인물들을 견제할려고 사령관이 약속한 퇴직금 등 군대에 지불해야 하는걸 안주거나 막는 대처를 한 원로원이 근본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즉. '''마리우스가 군제개혁을 해서 문제가 생긴게 아니라 군제개혁을 해야 할 정도로 원로원이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애초에 이 문제는 마리우스 등장 20~30년 전에 활약한 [[그라쿠스 형제]]도 제기했지만 이에 대한 원로원의 응답은 [[원로원 최종권고]]와 그에 따른 불법적이고 무자비한 학살 뿐이었다. 어쨌든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단행한 뒤 군대를 증강하였고 이러는 동안 마리우스의 임기가 끝나게 된다. 이에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계속 집정관에 연임시켰고 때문에 마리우스는 전대미문의 5년 연속 집정관에 당선되는 행운을 누린다.[* 5년 연속으로 집정관에 당선된 인물은 임기 제한이 없었던 공화정 초기에도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전대미문한 일이었다.] 이렇게 마리우스가 연달아 집정관이 될 수 있었고 또한 원로원이 이것을 묵인했던 이유는 30만에 이르는 게르만족이 언제 이탈리아로 남하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르만 족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을 몰살시킨 뒤 계속 이탈리아 침공을 미루었고 이 사이에 마리우스를 계속 집정관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사실 마리우스는 전직 집정관으로서 군사활동을 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직 집정관과 현직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였다.([[집정관]] 항목 참고) 게르만족에 대한 전쟁준비를 마리우스에게 전부 맡기고 싶어했던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계속 현직 집정관인 상태로 두고자 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의 참패는 전직 집정관 퀸투스가 현직 집정관 막시무스의 밑에 들어가길 거부한 것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마리우스는 막시무스와 마찬가지로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귀족 출신인 현직 집정관이 마리우스의 명령에 거부하려 들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게르만 족이 남하할 가능성이 있는 기간 동안엔 계속 마리우스를 현직 집정관으로 선출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